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니가키 사다카즈 (문단 편집) === 정계 입문 === 그러던 중 [[문부과학성|문부과학대신]]을 역임한 아버지 다니가키 센이치 의원이 사망한 뒤 1983년 아버지의 지역구 [[교토부 제2구(중선거구)|교토부 2구]]에서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. 이때 같은 지역구에서 함께 당선된 것이 [[노나카 히로무]] 전 자민당 간사장이다. [[제2차 하시모토 개조내각]]에서 과학기술청 장관에 취임하면서 처음으로 입각했다. [[고이즈미 내각]]에서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, 산업 재생 기구 담당 대신, 식품 안전 담당 대신 등을 거쳐 재무대신을 역임했다.[* 이 당시 그 유명한 '''[[일은포]]''' 작전을 재무대신으로서 총지휘했다.] 이후 [[2006년]]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나 [[아베 신조]]에 밀려 낙선했다. || [[파일:타니가키 사다카즈 선거유세.jpg|width=350]] || || '''{{{#fff △ 선거 유세를 하는 다니가키 사다카즈 총재}}}''' || [[2008년]] [[후쿠다 야스오 개조내각]]에서 국토교통대신으로 입각했으며 후쿠다의 총리직 사퇴 이후 치러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재출마하려고 했으나 포기했다. [[2009년]]에 자민당이 기록적인 참패를 기록하며 [[민주당(일본 1998년)|민주당]]에 정권을 내준 [[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]] 시점에서도 지역구인 [[교토부 제5구]]에서 당선되었다. 그 후 동년 9월 치러진 자유민주당 후임 총재 선거에서 [[고노 다로]], [[니시무라 야스토시]]를 제치고 당선되어 자민당 총재에 취임했다. 취임 이후 [[그림자 내각]]을 구성하려고 했으나 무산되었다. 정권 상실로 14명의 현직 의원이 탈당한데다가 사실상 거의 모든 계파의 의미가 없어진 상황에서 위기에 처한 자민당을 이끌어야하는 곤란한 처지가 됐다. [[2010년]] [[7월 11일]] 열린 제 22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13석을 추가하며 연립여당인 [[민주당(일본 1998년)|민주당]]과 [[국민신당(일본)|국민신당]]의 참의원 과반의석을 무너트리며 선전했다. 이 선거로 [[2007년]]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이후 민주당에게 당한 선거전 연패에서 탈출했으며 민주당 [[간 나오토]] 총리를 정치적 위기로 몰아넣었다. 선거 직전 간 총리가 뜬금없이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해 소비세를 인상해야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남긴 탓에 민주당 정권에 대한 역풍이 불어 이 틈을 타 선거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지만 득표율에서는 7.49%p 뒤져 자민당의 세가 완전히 부활했다 보기는 어려웠다.[[https://www.mk.co.kr/news/world/view/2010/07/367255/|#]] [[2012년]] 9월, 총재 선거에 재출마하려고 했으나 당시 간사장이던 [[이시하라 노부테루]][* 망언제조기로 유명한 [[이시하라 신타로]]의 아들이다. 동생인 이시하라 히로타카도 같은 당에서 중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.]가 출마를 표명하면서 재출마를 포기했다. 그렇게 [[일본 내각총리대신|내각총리대신]]에 취임하지 못한 2번째 자민당 총재가 되었다.[* 첫번째는 [[고노 담화]]로 유명한 [[고노 요헤이]] 前 관방장관.] 이후 [[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]]에서 자민당이 다시 정권을 되찾아오면서 [[아베 신조]] 2차 내각에서 법무대신을 역임했으며, [[2014년]]에는 자민당 간사장에 취임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